[MOT] 경성치과의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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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 경성치과의학교
  • 류재청 기자
  • 승인 2017.11.0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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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ent of Truth

1914년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함석태가 치과의사 면허 1호를 취득했다. 하지만, 1920년까지 한국인 치과의사 면허등록자는 고작 3명이었다. 이 시기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서는 치의학교 설립을 목표로 한국 최초로 치의학교실을 개설(1915년)하였다. 이어 교장 에비슨(O.R.Avison)은 1921년 7월 50만원의 자금을 준비해 치의학교 설립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대신 일본인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로 하여금 ‘경성치과의학교’ 설립인가 신청서를 제출(1921.12)케 하여 이를 인가(1922.4)해 주었다.

1927년 3월 21일 경성치과의학교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 교장은 총독부로부터 저경궁 터(서울시 남대문로 3가 111번지의 2호) 662평을 무상대여 받았다. 이 터에 마련된 소공동 교사는 1927년 6월 착공하여, 1928년 9월 지상 4층, 대지 662평, 건평 1600평으로 완공하였다. 소공로 일대는 한국은행 광장을 통해 명동 상권과 연결되면서 경성의 대표적인 경제중심지이며 대중적인 상업공간으로 변모하였다.

경성치과의학교는 1932년까지 총 103명의 한국인 졸업생(일본인 73명)을 배출하고 폐교되었다. 1929년 병설된 경성치과전문학교는 문부성 인가(1931)를 받은 뒤 1945년까지 총 452명의 한국인 졸업생(일본인은 1,007명)을 배출했다. 일제강점기 경성치과의학교와 경성치과전문학교를 졸업한 한국인은 총 555명이었다.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발행, ‘경성치과의학교의 시간과 공간 이야기’에서 발췌>

 

해방 후, 경성치과전문학교는 국립서울대학교 법령(1946.8.22)에 따라 시설과 기록, 교수, 학생 모두가 국립서울대학교에 귀속되었다. 1969년엔 한국은행에 자리를 내어주고 연건동으로 돌아가면서 41년 간 이어져 온 소공동 시대(1928~1969)가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됐다.
당시의 소공동 교사는 한국은행 별관으로 쓰이다 1981년 철거됐다. 지난달 26일엔 바로 이 경성치과의학교의 옛터(한국은행 자리)에 표석을 세우는 제막 행사가 열렸다. 이날 제막식에는 한중석 치의학대학원장을 비롯해 김명기 박물관장, 안창영 동창회장, 허성주 치과대학병원장, 한국은행 관계자 그리고 소동공에서 교사에서 공부했던 졸업생 등이 참석해 옛터가 갖는 의미를 되새겼다.
이 자리에서 한중석 대학원장은 “이 터를 한국은행에 내어주고 애초 학교를 시작했던 연건동 그 자리에 새 터를 마련한 바 있다”며 “그러나, 연건캠퍼스에서 소공동 터를 기억함은 근대 치의학을 잉태한 역사 흐름에 대한 경외이자 나아가야할 역사 발전에 대한 다짐”이라며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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