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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천재화가 렘브란트
권호근  |  denfoline@denfol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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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02  13:3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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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하면 대부분 고흐를 떠올립니다. 강렬했던 삶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렘브란트 역시 네덜란드의 빼놓을 수 없는 화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입니다.
렘브란트는 ‘빛의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렬한 명암대비를 통해 작품에 스포트라이트를 주는 표현방식은 작품의 의도와 작품 속의 인물을 극적으로 연출하여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이러한 기법은 렘브란트가 개발한 독창적인 발상이라기보다는 17세기 카라바조(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 화가)의 영향입니다. 카라바조는 어둠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작품의 인물을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그는 화가로서 천부적 재능을 지녔지만 정작 인생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성격이 과격했던 카라바조는 사람들과 싸우다 살인을 저질러 좆기는 신세로 말년을 보냈으니 그의 인생은 그림만큼이나 극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된 카라바조의 작품을 보면 350년 전에 그린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물들이 살아있습니다. 작품 자체도 뛰어나지만 긴 시간을 훼손 없이 작품을 보존한 메디치 가문의 예술사랑 역시 대단합니다.
렘브란트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처음으로 그림을 팔아서 경제적 자립을 한 화가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화가들은 궁정에 소속되어 있거나 귀족들의 후원 하에 작품 활동을 했지만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생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통해 많은 부를 쌓았습니다. 또한 렘브란트는 자존심이 매우 강해 고객이 작품 수정을 요구해도 화가가 그린 것이 최고의 작품이라며 절대로 응하지 않았습니다. 렘브란트가 활동하던 17세기는 네덜란드가 대서양 무역을 장악한 시기입니다. 덕분에 암스테르담의 상인과 시민계급층은 무역거래를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네덜란드는 종교개혁 후에 캘빈파의 영향 하에 있었는데, 캘빈파는 교회의 사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화가들이 종교화나 성화를 그리는 것을 제재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화가들은 정물화에 주목하게 되었고 무역으로 돈을 번 암스테르담의 시민들을 중심으로 정물화를 구입하여 집안을 치장하는 풍조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화가였기 때문에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고 덕분에 시내에 저택을 구입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객과 타협하지 않는 성격으로 인해 점차 그림 주문이 줄어들었습니다.
지금은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작품인 <야경꾼>은 렘브란트가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5인의 집단 초상화인 이 작품은 독특한 구도와 음영기법으로 인해 현재는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주문한 사람들의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았고 그림 수정도 거절한 탓에 의뢰자들의 빗발치는 항의와 혹평 세례를 받습니다. 이후 그림 주문이 격감하고 설상가상으로 부인도 죽었습니다. 결국 풍족했던 시절을 뒤로 한 채 렘브란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지만 오히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세계에 몰입하여 여러 초상화를 남겼습니다.
실제로 암스테르담을 방문했을 때 고흐 미술관은 암스테르담의 명소로 많은 관광객들이 북적였지만 정작 렘브란트 미술관은 시내 일반 건물들 사이에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렘브란트 미술관은 실제 작가가 거주하던 집을 개조해 만들었기 때문에 화가의 체취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미술관 안에는 렘브란트의 침실, 세밀 동판화 제작 공방, 수집한 골동품들로 이루어진 수납장, 작품 활동 당시 쓰던 특수 광물 물감들이 잘 전시되어 있습니다. 암스테르담을 방문할 기회가 된다면 렘브란트 미술관도 꼭 들러 보시길 권합니다. <2015년 3월 23일>
 
 
권호근 선생은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모교에서 예방치과학교실 초대 주임교수, 치과대학장, 치의학대학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난 2018년 8월 정년퇴임했다.
이 글은 퇴임과 함께 출간된 ‘권호근 선생의 월요편지(참윤 출판)’에 실린 내용으로, 동명의 타이틀로 매월 선별해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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