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호근 선생의 월요편지] (10) 로댕 미술관의 칼레의 시민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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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근 선생의 월요편지] (10) 로댕 미술관의 칼레의 시민 조각상
  • 권호근 교수
  • 승인 2019.07.01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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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근 선생의 월요편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을 배경으로 한 칼레의 시민 이야기는 지도자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물론 각색된 이야기라는 설이 있지만 내용이 감동적입니다. 1337년 영국과 프랑스 간 영토 분쟁과 왕위계승 문제로 백년전쟁이 일어납니다. 도버 해협 인근 프랑스 해안도시 칼레는 영국과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집중 공격을 받습니다. 칼레 시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결국 1년 만에 항복합니다.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이유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 모두를 죽이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만류로 시민학살을 취소하고 대신에 칼레시 지도자 6인을 뽑아오면 시민을 대신하여 처형하고 나머지 시민들을 용서하겠다고 합니다.
 
로댕 미술관의 칼레의 시민 조각상
로댕 미술관의 칼레의 시민 조각상


이때부터 시민들은 어떻게 6인을 뽑아야 하는가를 고민합니다. 제비뽑기를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이때 칼레시의 제일 부자로 알려진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스스로 죽음을 자처하면서 나섭니다. 이후 변호사, 시장 등 당시 칼레시 지도자 6명이 스스로 죽음을 자처합니다. 6명을 보내야 하는데 죽음을 자처한 사람이 7명이 되어서 누구를 제외해야 하는가를 논의하다가 다음날 아침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제외하기로 약속합니다.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죽겠다던 생 피에르는 나타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순간 그의 아들이 나타나 아버지가 스스로 자살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양보하기 위해 스스로 자살한 것입니다. 6인의 칼레시 지도자는 스스로 교수형 밧줄을 목에 걸고 영국 왕에게 갑니다. 당시 임신을 하였던 왕비가 이러한 의인들을 죽이면 뱃속 왕자의 미래 운명에 나쁜 영향을 주므로 살려주기를 간청하여 영국 왕은 결국 6인의 지도자를 모두 살려 줍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재미작가 김은국씨가 쓴 『순교자』라는 소설이 생각납니다. 노벨 문학상 후보작에도 오른 소설 『순교자』는 6.25전쟁 때 평양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입니다. 6.25 전쟁 중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평양교회의 지도적인 목사 12인을 납치합니다. 젊은 인민군 장교는 이들 목사들에게 십자가를 발로 짓밟고 하나님을 부정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총살하겠다고 협박합니다. 11명의 목사들은 십자가를 짓밟고 하나님을 부정하면서 목숨을 구걸했지만 이들 중 한 명인 ‘신목사’만은 인민군 장교의 제의를 거부하고 총살시켜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민군 장교는 하나님을 부정한 11명의 목사는 총살시키지만 ‘신목사’는 목숨을 살려서 돌려보냅니다. 평양 신자들은 11명의 목사들은 순교자로 찬양하지만 살아 돌아온 ‘신목사’를 보고 11명의 목사들의 목숨을 팔아서 살아온 ‘가롯유다’와 같은 배교자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신목사는 평양신도들이 실상을 알면 좌절할까봐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비난을 감수합니다. 그러나 신목사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여기서 작가는 문제 제기를 합니다. 죽은 11명의 목사와 신목사 중 누가 순교자인가? 결론은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12명의 목사 모두가 순교자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서 신앙적 문제보다는 목숨을 걸어야하는 엄혹한 상황에서 지도자는 어떠한 결단과 처신을 해야하는가 하는 문제가 더 실제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칼레의 시민상>은 칼레 시민들이 로댕에게 요청하여 제작된 작품입니다. 칼레 시민들은 6인의 의인을 영웅적인 모습으로 조각해 주기를 원했으나 로댕은 이를 무시하고 고뇌와 두려움에 싸인 지극히 평범하고 초라한 인간들로 조각했습니다. 칼레 시민들은 분개하였으나 로댕은 예술가로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습니다. 여기에 로댕이 예술가로서의 탁월함이 있습니다. 지도자건 평민이건 죽음 앞에서 초연하고 두렵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지도자’입니다. 영웅적 모습대신 초라한 모습으로 조각된 칼레의 시민상을 보면서 오늘날 한국에서 지도자란 누구이고 예술가란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2015년 6월 29일>
 
※ 권호근 선생은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모교에서 예방치과학교실 초대 주임교수, 치과대학장, 치의학대학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난 2018년 8월 정년퇴임했다.
이 글은 퇴임과 함께 출간된 ‘권호근 선생의 월요편지(참윤퍼블리싱)’에 실린 내용으로, 동명의 타이틀로 매월 선별해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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