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지먼트] 질병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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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지먼트] 질병 체험
  • 김동석 춘천예치과 원장
  • 승인 2023.03.09 1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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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 원장의 치과인문경영학(46)

자연과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현상을 다루는 것이라면, 인간의 가치탐구를 대상으로 하는 또 다른 학문이 있으니 우리는 이를 ‘인문학’이라고 한다. 한동안, 방송가와 서점가의 핵심 키워드로 등장해 큰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이런 분위기와 관심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에 본지에서도, ‘치과계의 철학자’로 불리는 춘천 예치과 김동석 원장을 통해 인문학의 무대를 치과로 옮겨, 경영 전반에 걸친 다양한 이야기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글 | 김동석 원장(춘천 예치과)

 

나는 치과대학 입학 전까지 치과를 가본 적이 없다. 젖니도 집에서 실로 뽑았다. 잘 뽑히지 않는 젖니는 학교 구강검진 나온 치과의사가 뽑아주었다. 고맙게도 나의 젖니는 치과 한 번 가지 않고 다 뽑았지만 문제는 사랑니였다. 17~18세쯤, 사랑니가 너무 아파서 동네 한 허름한 치과를 갔다. 대기 환자가 한 명도 없었고 원장실로 보이는 방은 TV 소리와 함께 뿌연 담배 연기가 스며 나왔다. “순간 잘못 찾아왔다” 싶었지만 그곳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예쁜 누나가 “어디가 아파서 왔냐”며 물었고 사랑니를 뽑고 싶다고 이미 말하고 있었다. 돌아보니 X-ray 사진도 찍지 않았다. 얼마 뒤, 치과의사가 나왔다. 미러로 검사를 잠깐 하더니 오늘 뽑아주겠다며 마취 주사를 놨다. 좀 아프기는 했지만 아픈 것보다 ‘손에 밴 담배 냄새’가 더 역했다. 아플까 봐 걱정하는 것도 잠시, 냄새 나는 손은 어느새 입속으로 들어왔다. 근데 웬걸 입을 벌리자마자 사랑니가 뽑히는 게 아닌가. 허름하고 담배 연기 자욱했던 치과는 사랑니 잘 뽑는 치과로 내 생각을 바꿔놓았다.
 
첫 치과 방문이 사랑니 때문이어서 그럴까? 이제는 나도 젊은 환자들 사랑니를 자주 뽑는다. 개원을 함께한 구강외과 원장 옆에서 많이 배운 것도 있지만 예전부터 사랑니 발치를 좋아했다. “앓던 이”를 뽑아주는 극적인 역할극에서 배제되기 싫었기 때문이랄까? 사랑니를 잘 뽑는 치과의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어렴풋한 나의 치과 첫 방문 경험 때의 희망을 실천하고 싶기도 해서다.

● 모든 병은 ‘이야기’가 있다
나는 사랑니가 아파서 뽑았던 것을 ‘부종과 염증으로 인한 통증’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앓던 이를 빠르게 잘 뽑아주었던 ‘담배 냄새 자욱한 치과의 냄새 나는 손’ 기억이 이야기가 된다. 

얼마 전, 내가 사랑니를 뽑아줬던 학생이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그 환자와 마주한 시간도 짧고 나눈 대화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자그마치 ‘세 편의 발치 이야기’가 있었다. 예약을 어떻게 했는지,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X-ray를 찍고 자신의 치아를 보며 든 생각들, 마취 주사를 맞을 때의 느낌, 이를 뽑을 때 머릿속으로 상상한 기구의 다양한 모양들, 의사의 짧은 말들, 스케일링을 받을 때 치과위생사의 터치와 말들 등 그 짧은 치료의 과정에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블로거라서 그렇지 대부분 환자도 이런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우리는 다양한 조연으로 나온다. 어떤 조연이 되느냐는 어떻게 연기를 하느냐에 달렸다.

● 질병은 삶 속에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질병을 가리키는 용어는 ‘disease(질병)’와 ‘illness(질환, 아픔)’인데 의미가 좀 다르다. ‘disease’는 일반적으로 생물학적 질병을 가리키지만 ‘illness’는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주관적 느낌과 체험적 측면을 포함한다. 영어와 다르게 우리나라 말 ‘병을 앓는다’라는 것은 신체적 통증이나 정신적인 고통, 실존적 아픔까지도 모두 포함한다.

최근 의과대학에서 의료인문학 수업을 통해 실제 환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나 문학 작품을 활용해서 모의 환자와 의사소통 방법을 배운다. ‘질병이야기’, ‘질환내러티브’, ‘질병체험이야기’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고 이런 텍스트를 ‘질병체험서사(illness narrative)’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narrative’는 이야기(story)뿐만 아니라 표현되는 형식을 뜻하는 담화(discourse)까지 포괄하기 때문에 ‘서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소통을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환자에게 질병이란 단순한 생물학적, 병리적 과정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 환자가 질병에 대해 어떤 느낌이 받고,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는 것은 환자 관점에서 질병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 질병이 아닌 환자의 ‘이야기’에도 관심을
오래된 틀니를 사용하고 있는 환자가 자식과 함께 왔다. 마모가 심해진 틀니로 제대로 씹기 어려워 보였지만 틀니 보험 혜택을 받으려면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사실관계를 말씀드렸더니 환자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함께 온 보호자는 한사코 새 틀니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실랑이 끝에 결국 새로 만들기로 했다. 보호자는 따로 나에게 찾아와 환자가 말기 암이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치매로 인해 본인 상태를 정확히 인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새 틀니를 해드려야 가시는 저승길 식사라도 제대로 하지 않으시겠냐고 했다. 예전에는 돌아가시기 전에 새 틀니를 끼워드리고 싶다며 찾아오는 분들이 꽤 있었다. 화장(火葬)을 많이 하는 문화로 바뀌면서 줄었지만 치아 하나 없이 저승길을 떠나는 부모를 보며 마음 아파하던 때가 있었다. 새 틀니를 드리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던 시절이었다. 이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새로 만들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했다면 어땠을까? 

환자의 삶과 상관없이 의학적 지식만을 나열하거나 무조건 적용하는 것은 효과적인 소통을 방해한다. 신경학자이자 의사인 색스(O. Sacks)는 근대 이전 의학은 ‘이야기 전통’이 존재했다고 말한다. 환자 이야기를 듣고 이를 진단과 치료의 근본으로 삼는 것은 히포크라테스 이래 서양의학의 근간이었다. 하지만 현대 의학은 이야기의 전통을 많이 잃어버렸다. 자율성 존중이라는 원칙하에 환자의 권리가 향상되었음에도 의료 현장에서 환자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서사 포기 현상(narrative surrender)’이 일어나고 있다. 
바쁜 시간에 이야기를 많이 하는 환자를 우린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자본주의 의사의 한계다. 하지만 환자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이해하는 능력. 이를 통해 ‘공감’과 ‘지혜’를 갖춘 의료인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적어도 환자 이야기 속 ‘악당’이 되지 않기 위한 최소의 연기이자 현대 의학에서 소외된 개인을 살리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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