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호근 선생의 월요편지] (34) 바람의 집 風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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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근 선생의 월요편지] (34) 바람의 집 風 미술관
  • 권호근 교수
  • 승인 2021.07.0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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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근 선생의 월요편지

바람과 돌의 섬 제주도 핀크스 골프장 인근에 재일동포 건축가 이타미 준(한국명 유동룡 1937-2011)이 설계한 비오토피아 내에 명상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水, 風, 石 미술관이 있습니다. 이타미 준은 재일동포 출신으로 세계적인 건축가 반열에 오른 건축가입니다.

무사시 공대 건축과를 졸업한 이타미 준은 조센징이라고 차별 받으면서도 일본인으로 귀화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본사람으로 간주되어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경계인이자 이방인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일본 이름으로 개명도 거부했으나 개명하지 않으면 건축 설계사무소 개설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할 수 없이 개명했다고 합니다. 일본 이름 이타미준의 이타미는 자신이 한국에 올 때 주로 이용하는 이타미 공항에서, 그리고 자신이 평소 좋아하였던 작곡가 길옥윤의 ‘윤’의 일본식 발음인 준을 합성하여 이타미 준이라 작명했다고 합니다.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치과의사의 삶 대신 작곡가의 삶을 살다간 길옥윤 선생 역시 경계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가수 패티김과 결혼했지만 말년에 이혼하고 일본 나이트클럽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면서 외롭게 살다 갔습니다. 판소리 풍의 시원한 창법을 구사하는 패티김은 저도 좋아하는 가수입니다. 길옥윤이 작곡하고 패티김이 부른 <서울의 찬가>는 많은 국민들이 좋아하는 국민 애창곡이었습니다. 아마도 이타미 준이 길옥윤 선생을 좋아했던 이유는 두 사람 모두 경계인으로 살면서 느꼈던 동병상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경계인으로 산다는 것은 외롭고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얽매임이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고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작가 중에는 경계인으로 산 사람이 많습니다. 문화제국주의를 비판한 『오리엔탈리즘』을 저술한 팔레스타인 출신 작가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 영성적인 글로 유명한 작가 칼릴 지브란(1883~1931) 역시 동서양의 경계부인 중동지역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서 출생했지만 두 사람 모두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 경계인으로 살았던 작가들입니다. 

제주 바람을 느낄 수 있는 바람(風) 미술관. 한쪽 벽면이 살짝 곡선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주 바람을 느낄 수 있는 바람(風) 미술관. 한쪽 벽면이 살짝 곡선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창조는 중심부보다는 주변부나 경계부에서 주로 일어납니다. 경계인으로 살기 때문에 생기는 긴장감과 정체성 혼란은 고통이지만 한편으로는 창조의 근원입니다. 이타미 준도 정체성 혼란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을 방문한 후에는 한국 문화에 매료되어 한국에서 여러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제주도를 너무 좋아하여 여러 건축 작품을 남겼는데 핀크스 골프장 클럽하우스, 방주교회, 포도호텔, 水, 風, 石 미술관이 그의 유작들입니다.

이타미 준 선생의 큰 딸인 건축가 유이화씨가 자신의 아버지를 회고하면서 쓴 <바람의 집>이란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딸에 의하면 水, 風, 石 미술관 중 風 미술관은 아버지 이타미 준의 삶과 건축철학을 가장 잘 표현한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붉은 赤松으로 지은 이 건물은 처음에는 붉은색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붉은빛이 점차 바래가면서 주변환경과 동화되어 갑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틈이 있는 벽 구조는 제주도 특유의 바람을 잘 느낄 수 있게 설계되었습니다. 아마도 평생 경계인으로 산 이타미 준 선생도 제주 자연에 서서히 동화되면서 제주도의 바람같이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몇 년 전 여름 휴가 당시 처음 올라갔던 한라산 산록의 오름 풍광은 서귀포 주상절리에서 보이는 제주 바다의 풍광과는 또 다른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경관이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된 거문오름 분화구의 곶자왈과 주변에 인공으로 잘 조림된 삼나무 숲 역시 아름답습니다. 숲을 의미하는 곶과 돌을 뜻하는 제주 방언 자왈의 합성어인 곶자왈은 화산돌 무더기에 형성된 덤불숲으로 구불구불하게 자란 나무들은 신령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또한 생태학적으로도 제주의 숨구멍과 물 저장소 역할을 하는 중요한 생태 숲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움츠리게 만드는 도시의 바람과는 달리 아부오름 정상에서 온 몸으로 마주하는 제주 바람의 느낌은 자유로움 그 자체입니다. 멀리 보이는 제주 푸른 바다 그리고 한라산 산록의 부드러운 오름 능선들을 보면서 오름 곡선을 건축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이타미 준의 제주도 건축작품들과 제주 바람을 표현한 바람 미술관이 떠올랐습니다.


※ 권호근 선생은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모교에서 예방치과학교실 초대 주임교수, 치과대학장, 치의학대학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난 2018년 8월 정년퇴임했다. 이 글은 퇴임과 함께 출간된 ‘권호근 선생의 월요편지(참윤퍼블리싱)’에 실린 내용으로, 동명의 타이틀로 매월 선별해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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