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편지] (37) 불각재(不刻齋)와 사미루(四美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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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편지] (37) 불각재(不刻齋)와 사미루(四美樓)
  • 권호근 교수
  • 승인 2021.10.08 16: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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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근 선생의 월요편지
북한산 전경
북한산 전경


불각재는 우성 김종영(又誠 金鍾瑛, 1915~1982) 조각가를 기리는 기념미술관입니다. 조각가의 기념미술관이 조각을 하지 않는다는 불각재(不刻齋)라 하니 역설적이지만 자신의 예술관을 표현한 멋진 명칭입니다. 후에 건축된 사미루(四美樓)는 작가의 고택 사랑채에 걸린 현판에서 차용한 명칭으로 신진작가의 전시장이자 불각재 카페의 명칭이기도 합니다. 사미(四美)란 좋은 날, 아름다운 경치, 기쁜 마음, 즐거운 일이란 뜻으로 남조 사영운 글귀에서 따온 말입니다. 카페 명칭대로 카페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풍광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휘문의숙과 동경미술학교 졸업 후 서울미대 조각과 교수를 역임한 김종영은 영남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영남 사림파 영수인 김종직의 제자인 사관 김일손의 직계 손입니다. 강직한 사관 김일손은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화근이 되어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 사건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이러한 사대부 가문 배경 때문에 김종영은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예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전시된 서예작품을 보면 조각가이기보다는 서예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김종영은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습니다. 예술 삼매경을 추구하는 추사의 예술관은 ‘예술은 그 자체의 즐거움으로 해야지 명예나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예술가는 기성 관념에 도전하는 도전정신과 일체의 불순을 거부하는 자유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추사는 당시 중국의 서법을 따르지 않고, 세간의 비난도 아랑곳 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독창적 서법인 추사체를 창안하여 서예를 예술의 경지로 발전시킵니다. 네덜란드 철학자 요한 호이징가는 자신의 저서 호모 루덴스에서 모든 학문과 예술의 시작은 유희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추사는 호이징거보다 100년 앞서서 예술의 본질은 ‘유희 정신’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1958년에 쓴 기고문을 보면 김종영의 예술관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술이란 거짓에 기초를 둔다. 그러므로 작가는 거짓이란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거짓이 자기의 예술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예술의 진실은 어디까지나 가공적인 거짓에 있는 것이고 진실한 거짓만이 예술이다. 김종영의 이러한 예술관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동굴 벽에 비친 허상으로 실상은 동굴 밖으로 나와야 볼 수 있다는 플라톤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서양 추상예술의 시작이 그러하듯 이종영이 추상 조각을 시작한 것도 허상 세계인 현실을 똑같이 묘사하는 구상예술로는 사물의 본질을 표현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김종영은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인 김환기 화백과 동시대에 같이 활동한 작가입니다. 김환기 화백의 초기 작품을 보면 서양의 이성적 지성에 기반을 둔 추상회화의 흐름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한국적인 미를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김종영 역시 서양의 이성적 지성과 동양의 직관 사유를 어떻게 잘 조화시켜서 한국 조각 예술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확보할 것인가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김종영의 표현에 의하면 언어 자체가 추상회화입니다. 언어가 추상회화라면 언어를 표현한 문자 또한 추상회화입니다. 의미 전달과 동시에 형태적 아름다움을 표현한 다양한 동양의 서예는 그 자체가 추상회화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캘리그래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공감이 갑니다. 특히 추사체는 파격적이고 추상적인 요소가 많은 서체입니다. 전시회를 돌아보면서 조각가 김종영이 추사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받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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