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편지] (38) 書法, 書道, 書藝(서법, 서도, 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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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편지] (38) 書法, 書道, 書藝(서법, 서도, 서예)
  • 권호근 교수
  • 승인 2021.11.03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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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근 선생의 월요편지

붓글씨를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서도(書道)’ 그리고 한국에서는 ‘서예(書藝)’라고 합니다. 동양 삼국의 문화적 특징을 반영한 표현입니다. 일상용어로 한문을 사용하는 중국에서는 서체에 대한 법칙이 이미 오래전에 정립되었기 때문에 ‘서법’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반면에 모든 것을 압축적이고 간결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禪 불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일본에서는 검도, 다도의 예에서 보듯이 붓글씨도 ‘서도’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시절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서도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광복 이후 한국 서예계 거목인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2~1981) 선생이 서도는 일본의 용어이므로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식민사관을 극복하자는 의미에서 ‘서예’라는 용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붓글씨의 최고의 경지는 書法도 아니고 書道도 아니고 바로 書藝입니다. 서법하면 일정한 형식과 법칙이 있다는 것이 연상되기 때문에 경직된 인상이 듭니다. 서도하면 수단적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인상을 줍니다. 서예는 예술로 승화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書法를 그대로 답습하였던 조선시대에서 독창적인 서체를 창조하여 서예를 예술의 경지로 발전시킨 사람은 조선 중기 천재 학자이자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입니다. 영의정을 지낸 고조부 김홍경과 영조의 제일부마인 증조부 김한신의 손자로 태어난 김정희는 조선 최고 명문가 출신입니다. 또한 머리도 총명하여 일찍부터 조선 성리학을 통달하였고 선진적 의식을 가졌던 조부와 백부의 영향을 받아서 당시 신학문인 북학의 기수 박제가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연유로 성리학과 신학문인 북학을 동시에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추사는 비문 글씨가 건립 당시 원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금석학 연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금석학 연구를 통해서 서법의 기본 법칙이라 알려진 ‘왕희지체’ 역시 그 근원은 한나라의 팔분예서(八分隸書)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궁극적으로 예서(隸書)야말로 서예의 극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추사체는 동양 삼국에서 가장 독창적 서법이면서 예술적 추상미가 뛰어난 서체입니다. 추사가 쓴 예서 글씨를 보면 현대미술의 추상미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연세대학교 서예모임 지도하시는 분은 대한미술협회 서예분과위원장을 역임한 효정 선생이라는 분입니다. 제가 이분을 좋아하는 이유는 보통 서예학원 원장들과 달리 절대 본인의 글씨를 그대로 따라쓰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는 서예는 예술이므로 붓글씨와는 다르기 때문에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강조합니다. 서예는 획의 장단과 굵기, 먹의 농염을 적절히 조화시켜 예술성을 표현합니다. 우측 획을 짧게 쓰면 좌측 획은 길게 쓰고 종획을 굵게 하면 횡획은 가늘게 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글씨 획에서 필력과 기운이 느껴져야 합니다. 

소전 손재형 선생이 일본에서 되찾아온 추사의 대표작 세한도
소전 손재형 선생이 일본에서 되찾아온 추사의 대표작 세한도


조선 영·정조 시대 진경문화를 개화시켰던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연구의 일인자인 최완수 선생이 최근 추사 김정희 연구의 완결판인 『추사명품』이란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서예의 서체는 그 시대의 문화와 시대정신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최완수 선생에 의하면 이미 중국의 한문은 한나라 시대부터 추상적 문자미를 확립해 가고 있었고, 한제국의 침입과 한사군 설치로 우리나라는 직접적으로 중국의 문화적 영향을 받습니다.

고구려 시대 광개토대왕비는 예서의 풍미가 담긴 웅비한 기상이 느껴지는 해서체입니다. 백제 무령왕릉 묘지명은 유려한 왕희지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라 진흥왕이 세운 서울의 북한산비는 힘차고 정중한 서체입니다. 통일신라시대는 화랑정신에 알맞은 반듯하고 결기가 있는 구양순체를 사용합니다. 고려시대는 교종의 영향으로 보수적인 왕희지체를 받아들입니다. 9세기경에는 교종을 극복하고자 대두된 선종 때문에 새로운 이념을 반영하여 다시 반듯한 구양순체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12세기 고려 예종 시절에는 국력이 번성하고 문화가 융성해짐에 따라 이를 반영한 유려한 왕희지체가 다시 등장합니다.

모든 예술은 그 시대의 사상과 이념의 표현이듯이 최완수 선생의 『추사명품』을 읽어보면 서체도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서체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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