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편지] (43)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운 곳 바라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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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편지] (43)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운 곳 바라나시
  • 권호근 교수
  • 승인 2022.04.0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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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근 선생의 월요편지 43

뉴델리가 인도의 정치수도, 뭄바이가 경제수도라면 바라나시는 종교의 수도입니다. 바라나시에는 큰 규모의 힌두대학이 있고 인도 사람들이 ‘어머니 강’이라 부르는 갠지스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강이라는 뜻은 갠지스 물줄기가 인도 대륙의 사분의 일을 적시며 삶의 풍요를 선물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인도인의 삶과 영성 등 모든 것을 품고 유유히 흐르기 때문입니다. 인도 신화에 따르면 인도에 큰 가뭄이 들어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었는데 힌두신인 시바 神이 이를 가엾게 여겨 하늘에서 자신의 이마 위로 물을 흐르게 한 것이 갠지스 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도인들에게 갠지스 강은 힌두교 영성의 상징이자 시바신이 베푸는 자비의 표상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힌두교도들은 일생에 한번은 갠지스 강에 와서 목욕을 해야 정화가 되고 사후에 좋은 신분으로 태어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갠지스 강 가트 인근에는 유난히 구걸하는 늙은 걸인들이 많습니다. 이승에서는 걸인으로 살았지만 윤회의 내세에서는 좋은 삶으로 태어나서 잘살기를 바라는 염원인지도 모릅니다.

엔도 슈사쿠(Endo Shusaku, 1923-1996)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작가는 주로 종교적인 소재로 글을 쓰는데 말년에 쓴『깊은 강』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내용은 저마다 아픈 사연을 가지고 바라나시에 여행을 온 네 쌍의 일본 남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옴니버스 형태의 소설입니다. 주인공인 순진한 청년 오쓰는 실연으로 상처받은 후 프랑스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사가 되나 기독교에 대한 회의와 프랑스 신부와의 갈등으로 실망하여 수도원을 나옵니다. 그 후 인도 바라나시로 가서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갠지스 강가에서 죽어가는 걸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화장하는 일을 하면서 신을 만나고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힌두신관은 믿음 유무에 상관없이 신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범신론적인 신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유대 헤브라이즘의 유일신관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동양적 범신론과 기독교의 유일신관은 오랫동안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논쟁 주제였습니다. 잘 알다시피 서양 문명의 양대 축은 그리스 문명인 헬레니즘과 유대 전통의 헤브라이즘입니다. 기독교 신학도 이 양대 사상이 서로 영향을 주고 융합하는 과정에서 발전해왔습니다. 헬레니즘은 그리스 자연철학의 영향으로 범신론적인 자연신관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기독교 신학에서도 동양적 범신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파리 신학대학 학장이자 14세기 당대 저명한 신학교수인 에크하르트(Eck-hart Johannes 1260-1327)와 계몽철학자 스피노자(Spinoza, Baruch de 1632-1677)입니다. 생이란 고귀한 것으로 아무런 조건과 매개물 없이 직접 신이 주신 것이라는 에크하르트 신관은 동양적 범신론에 가깝습니다. 14세기 엄혹한 중세시대에 어떻게 이러한 신관을 주장할 수 있었는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결국 에크하르트는 사후 교황청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았고 스피노자는 유대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어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나 신의 은총은 존재하고 신의 사랑은 무한하고 무조건적이라는 범신론은 힌두교의 보편적인 신관입니다. 엔도 슈사쿠가 소설 제목을『깊은 강』이라고 한 것은 인도 사람들의 희노애락과 생로병사 등 모든 것을 품고 유구한 세월을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갠지스 강이야말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영성과 무한한 사랑의 강이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 갠지스 강으로 가는 길은 새벽부터 순례객들로 혼잡합니다. 강 건너 새벽안개 속으로 어른거리는 하얀 모래사구 언덕은 마치 피안의 세계와도 같습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바라나시 화장터에서 장작불에 타오르는 시신을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며 인생무상과 함께 삶과 죽음을 넘어선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장작 불길 위에 타고 있는 시신들을 보면 삶의 허무함이나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움보다는 삶의 소중함을 다시 느낍니다. 삶이란 에크하르트의 말대로 신이 주신 무조건적인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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