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치과의사] (12) 다윈에 가려졌던 과학자 월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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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치과의사] (12) 다윈에 가려졌던 과학자 월리스
  • 정우승 원장
  • 승인 2022.12.0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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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1등만 기억한다고 한다. 1969년 버즈 올드린이 암스트롱에 이어 17분 뒤에 달에 발을 디뎠는데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오늘은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1858년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공동저자가 바로 월리스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윈만 기억한다. 그 당시 인도네시아 섬에서 월리스가 발송한 편지를 받고 다윈이 거의 의자에서 떨어질 뻔 했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자신이 20년간 연구해 온 진화론의 이론이 고스란히 쓰여 있었던 것이다. 1만 6천km 떨어진 곳에서 무명의 영국 젊은이가 자신과 같은 내용의 이론을 적어 보냈으니 다윈으로서는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곧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생명신비의 비밀을 최초로 풀었다고 해서 근대 과학사 중 가장 중요한 학설이라는 진화론을 결국 공동 명의로(다윈의 발견 우선권을 전제로)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월리스는 자신의 편지가 학회에 보고된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13세부터 곤충 채집 판매로 생계를 유지하던 무명의 월리스가 진화론의 공동 주창자가 되었다. 문제는 1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계속 음모론에 휘말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윈이 월리스의 이론을 가로채고 공동 발표자로 올렸다는 내용이다. 

13세에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중단하고 아마존과 동남아 정글을 헤매고 다니며 동식물을 채집해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월리스와 달리 다윈은 영국의 전형적인 부유한 중산층 집안 출신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물리학자, 자연철학자, 의사였다. 외할아버지는 지금도 생산되는 본차이나 ‘Wedgewood’ 창업주이다. 이러한 영향력으로 보아 월리스를 누르고 다윈은 진화론의 아버지가 되었고 약한 월리스는 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음모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반전은 월러스가 진화론의 첫 실마리를 잡은 계기가 1842년 다윈의 비글호 탐사 보고서를 읽으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다윈이 토마스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게 만들었고 20년 뒤 진화론에 영감을 주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생전에 월리스는 앞장서서 다윈을 선전했다고 한다. 자신의 편지를 무시해도 됐을 텐데 저명한 과학자인 다윈이 자신을 공동 발표자로 넣어 유명하게 해주었으니, 1889년에는 <다위니즘>이란 책까지 써서 헌정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월리스에게 왜 직접 학술잡지사에 보내지 않고 다윈에게 보냈느냐고 안타까워했지만 본인은 “나처럼 학력도 없는 일개 곤충 채집 장사꾼의 추론을 누가 제대로 보기나 했을까요, 저는 다윈의 공동발표자로서 너무 만족합니다, 심지어 다윈과 자신이 비교되는 게 영광”이라고 했다. 이렇게 둘의 관계는 서로 인정하며 끝까지 아주 훈훈했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월리스의 평생에 걸친 진화론과 관련한 처신이 얼마나 너그럽고 고상했는지 모르겠다고 기술한다.    

월리스의 성공도 사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놀랍다. 아무런 정규 학력이나 연구경력이 없는데도 독학과 독서만으로 20권의 책과 논문 700여 편을 남겼고 귀족 출신이 아닌 사람이 최고의 영예인 영국 학술회원까지 되었다는 것은 학자들 사이에서조차 명실상부한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다. 다윈의 연구와 고상한 인품도 물론 본받을 만하지만 빈한과 고독했던 환경에서도 치열하게 파고드는 탐구의 정열을 지녔던 월리스에게 더욱 마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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