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편지] (52)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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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편지] (52) 풀
  • 권호근 교수
  • 승인 2023.01.04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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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목까지 눕는다.
바람보다도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첫 월요편지는 성공적인 연세 치의학 100주년 사업을 기념하고 연대 치대 가족들이 고립된 섬과 같은 존재가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정현종 시인의 ‘섬’과 존 던 시인의 ‘어느 누구도 섬은 아니다’라는 두 시인의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 바 있습니다. 이번 월요편지는 제가 젊은 날 좋아했던 두 편의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위 시는 김수영(1921-1968) 시인의 시 ‘풀’입니다. 오래 동안 잊고 있었지만 최근에 이 시가 다시 생각난 것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상황 때문입니다. 출퇴근 시 우뚝 서 있는 치과대학과 병원건물을 보면 하나님의 기적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눈 앞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지난 세월 들풀같은 생명력과 끈기로 자랑스러운 연세 치의학 100년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국가적으로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급격한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이룬 성공과 자부심은 도전받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 격화되는 종교 갈등, 점점 치열해지는 경쟁 등은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점점 악화되는 치과계의 외부 환경과 치과병원의 경영 상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를 답답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김수영 시인의 시 ‘풀’과 같이 우리 모두 바람이 불면 누웠다가도 스스로 다시 일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달라야 할 것은 누울 때도 생각하면서 눕고 일어날 때도 생각하면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열심히 하면 되었지만 미래는 생각하고 그 생각을 열심히 실천해야 합니다. 프랑스 와인 산업이 외부 환경의 도전을 창의적 발상을 통한 해결책과 실천을 통해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었듯이 우리도 창의적인 사고와 실천으로 치과대학이 직면한 문제를 돌파해 나가야 합니다. 창의적인 생각과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Paul valery: 1871-1945)의 명언이 있습니다. 사는 대로 생각해서는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새해에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어쨌든 살아남아 우리 후학들에게 연세 치의학 200년 역사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젊은 날 힘들 때마다 혼자 읊조렸던 폴 발레리 시인의 시 ‘해변의 묘지’의 마지막 구절로 올해 월요편지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세찬 바람이 내 책을 여닫고.
파도는 분말로 바위에서 마구 솟구치니.
날아라, 온통 눈부신 책상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삼각돛들이 모이 쪼던 이 조용한 지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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