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할머니의 우울증과 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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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할머니의 우울증과 틀니
  • 이근용(울산 참치과 원장)
  • 승인 2016.08.08 0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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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용(울산 참치과 원장)
▲ 이근용(울산 참치과 원장)

거리를 가득채운 햇살이 무섭도록 적막감을 주는 어느 늦은 봄날, 한 할머니께서 틀니가 안 맞아 너무 아프다며 따님과 함께 치과에 내원했다. 단정해 보이는 옷차림과 달리 할머니의 표정은 너무도 음습했다. 오래 됐음이 분명한 틀니는 전혀 맞지를 않았고, 그리고 심하게 마모된 인공 치로 인해 수직고경이 많이 감소된 상황이었다. 할머니의 외모는 마치 동화 속 마귀할멈과도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챠트를 보니 할머니께선 고혈압이 있었다.

“할머니 혈압 약은 잘 챙겨드시죠?”
나는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니요”
할머니는 무심한 듯, 혹은 너무도 당연한 듯 대답했다.
“네? 왜 혈압 약을 안 드시나요?”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죽으려고요, 빨리 죽고 싶어서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조용히 할머니께서 대답했다. 그 고요함이 섬뜩했다. 할머니에게 심한 우울증이 있어 보였다. 내 마음 속에선, 순간 많은 갈등이 일었다. 할머니의 진료를 시작해야 하나… 포기해야 하나…
언제나, 틀니치료의 예후는 환자의 적응력에 달려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틀니라고 하더라도 환자가 적응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틀니치료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과연 이 할머니께서는 새로운 틀니에 마음을 열 것인가? 당장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데 새로운 틀니에 적응하기 위해 애쓸 마음의 여유가 과연 있을까? 내 걱정은 흡연자의 치태처럼 빠르게 쌓여갔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불행을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에게 노출시킨다는 건 ‘내 불행을 좀 알아봐다오’라는 투정 같은 게 아닐까? 그리고 ‘나도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다’라는 마음 속 의지의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하악의 경우, 치조골의 흡수가 심했기에 우선적으로 locator attachment를 활용한 implant overdenture를 계획했으며 상악은 총의치를 계획했다. 우선, 하악에 두 개의 임플란트를 식립했는데 다행히 큰 불편감을 호소하지 않았다. 임플란트 수술도 했고 맞지 않는 틀니로 인해 지지조직이 많이 상해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기존 틀니에 tissue conditioner를 깔고 조직의 치유를 도모했다.

그렇게 몇 번 내원하는 동안, 할머니의 표정은 점점 밝아졌고, 그리고 그동안 우울해 했던 원인도 알게 됐다. 친절한 직원들이 딸처럼, 손녀처럼 느껴지셨는지 조금씩 마음을 열고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늘 하는 말씀이 얼마 전 돌아가신 어르신에 대한 얘기였다.
이후, 할머니의 표정은 점점 더 밝아졌다. 얼굴빛도 환해지고 웃는 모습도 자주 보게 되었다. 외로운 할머니의 마음을 직원들이 잘 보듬어 줬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아픈 곳이 없어지고 음식을 잘 씹을 수 있게 되면서 새 틀니는 이전 틀니보다 훨씬 더 나을 것이란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앞니 인공치 배열을 위해 할머니 웃는 사진 좀 갖다 달라고 했더니 첫 손주를 안고 할아버지와 환하게 웃는 사진을 갖고 오셨다. 아마도 가장 행복했던, 간절히 돌아가고 싶었던 한 때이리라. 나는 그 시절의 행복한 웃음을 찾아드리고 싶었다.

다행히 틀니는 성공적이었다. 할머니께선 달라진 외모와 implant 덕택에 편안해진 의치의 기능성에 무척이나 만족해했다. 그리고 의치를 장착하고 며칠 후, 곱게 립스틱을 바르고 오신 할머니의 모습 어디에도 마귀할멈 같은 모습이라든가 음습함, 그리고 우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곱게곱게 늙어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봐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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