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지먼트] 김동석 원장의 치과인문경영학-환자가 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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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지먼트] 김동석 원장의 치과인문경영학-환자가 된 의사
  • 김동석 원장
  • 승인 2023.06.08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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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현상을 다루는 것이라면, 인간의 가치탐구를 대상으로 하는 또 다른 학문이 있으니 우리는 이를 ‘인문학’이라고 한다. 한동안, 방송가와 서점가의 핵심 키워드로 등장해 큰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이런 분위기와 관심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에 본지에서도, ‘치과계의 철학자’로 불리는 춘천 예치과 김동석 원장을 통해 인문학의 무대를 치과로 옮겨, 경영 전반에 걸친 다양한 이야기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글 | 김동석 원장(춘천 예치과)

체어에 앉아 있는 환자에게 다가가면 어시스트는 “이제 진료 볼 겁니다. 뒤로 기대시고 체어 눕히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공포를 씌운다. 
하지만 가끔 “아니, 눕기 전에 원장님 얼굴이나 좀 봅시다. 얼굴이 기억이 안 나”라고 하면서 얼굴을 대면하고 얘기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있다. 
“어차피 마스크 써서 얼굴 잘 못보여 드려요. 잘 생기지도 않았는데요 뭐”라고 얼버무리면서 넘어가지만 속으로는 많이 죄송한 마음이 든다. 나야 하루 종일 이 환자 저 환자 보면서 바쁘게 넘어가지만 저 분은 오늘 오롯이 나를 보기위해 긴 대기시간을 참고 누웠는데 의사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그분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자세히 본 것도 처음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니 나도 심심치 않게 병원 신세를 진다. 불친절한 데스크 직원을 만나기도 하고, 말로 듣던 의사와의 60분 대기, 3분 진료도 많이 해봤다. 심지어 입원해서 수술을 받을 때도 막상 의사와의 만남은 회진때 1분 대화를 나눈 것이 다인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친절해도 배려와 따뜻함을 느끼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나도 의사임을 밝히고 또 아는 지인 소개, 친구 의사에게 찾아갔을 때는 그래도 좀 나았지만 그래도 깊은 대화를 의사와 나눈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 의사도 환자복을 입고 있을 때는 궁금한 것이 많아진다. 내가 알고 있는 의학적 지식도 담당의사에게 확인을 받아야 마음이 편하다. 아무런 지식이 없는 환자는 오죽할까.

초연한 관심
배려와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런 배려는 어렵다. 특히 대형병원의 긴 대기줄을 생각하면 이런 배려심 많은 의사는 쫓겨날 수도 있다. 그리고 바쁜 병원에서 일에 쫓기면서 수련을 받고 보고 배운 것이 대부분 ‘빨리빨리’다. 그리고 수많은 선배들로부터 환자와 거리를 두는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배웠다.

초연한 관심(Detached concern)은 1959년 사회학자인 르네 폭스(Rene Fox)가 제안한 개념으로 의과대학 학생들이 의학 교육 과정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고 했다. 특히 해부학 실습과 같이 감정적으로 힘들어질 수 있는 시기에 혼란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런 감정을 대상화하여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보는 방법을 내면화함으로 초연한 태도를 습득할 수 있다고 했다. ‘거리 두기’가 초연한 관심의 핵심인 것이다.

내가 배운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거리를 두지 않고 환자의 입장에서 너무 과몰입하게 되면 자칫 인정에 이끌려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리고 특정 환자에게 과도한 관심을 가지면 역으로 다른 환자를 차별하거나 소홀히 대할 수도 있다. 
더구나 환자의 감정에 휩쓸려 일희일비하다 의사는 쉽게 감정적 소진(burn out), 동정 피로(compassion fatigue)에 빠지게 될 우려도 있다. 따라서 의사는 늘 초연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초연함만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폭스의 생각을 오해할 수 있다. 그는 ‘초연함’과 ‘관심’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명료한 의학적 판단을 내리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초연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하지만, 동시에 환자에게 동정적인 돌봄(Compassionate care)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 충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환자와 감정을 공유하라는 말이다. 히포크라테스 총서에 보면 의료인으로서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는 일은 일종의 사랑 혹은 우정의 감정인 ‘필리아(philia)’를 통해 실현된다고 보았다. 
의사는 충분한 지식과 숙련된 기술 그리고 환자의 감정을 이해하는 태도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임상적 공감 
단것을 아주 좋아해서 이도 많이 썩고 가끔 보철물이 엿이나 젤리에 딸려 나와서 다시 붙이러 오는 환자가 있다. 이가 썩지만, 단것을 너무 좋아해서 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환자에게 만약 “저도 그 젤리 너무 좋아해요. 끊기 어렵죠”라고 말하는 것이 진짜 공감일까? 하지만 그것은 “피곤하고 아프냐? 나는 더 피곤하고 아프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고, “맛있어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은 저도 아니까 더 이상 얘기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실상은 공감인 것 같지만 사실은 환자의 말을 가로막는 것이다.
공감은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안심하고 풀어낼 수 있는 대화의 장으로 상대방을 초대하는 것이다. 왜 단 것을 좋아하고 끊을 수 없는지 호기심에 차서 물어보고 환자가 스스로 얘기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감을 환자의 감정을 ‘아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그것은 단지 공감의 인지적 측면일 뿐이다. 단순히 그 감정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가지게 된 이유를 궁금해해야 한다. 
의사이자 의료윤리학자인 조디 핼펀(Jodi Halpern)은 이를 ‘임상적 공감(clinical empathy)’이라 불렀다. 그는 환자에게 “당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와 같은 말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그 대신 “제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알려 주세요”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라고 권한다. 환자에게 의학적 호기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의사가 놓치고 있는 것
19세기 후반 이후 서양의학이 과학의 이념과 성과를 받아들이면서 의사의 감정은 주변부로 많이 밀려난 것이 사실이다. 과학자로서의 의사가 객관성과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감정’과 같은 주관적 요소를 배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과학자로서의 차가워 보이는 의사가 매력적으로 보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환자가 되어서 누워보니 나를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초연하게 대해주는 의사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보여주는 의사가 더 좋았다. 

의사들은 자신의 조금은 덜 완성된 의사로서의 실력이 드러날까 봐, 의학적으로 놓치는 것이 있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환자는 자기 생각과 감정, 말을 의사가 잘 몰라주거나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제가 잘 이해하고 있는 게 맞나요? 제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면 다시 말씀해 주세요”라는 말을 요즘 자주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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